• 최종편집 2024-04-17(수)
  • 전체메뉴보기
 

s이동규 목사.jpg

 

이 목사 “요시야의 개혁은 종교적 측면 넘어선 왕실의 정치활동”
“산당 타파는 ‘정결화’ 아닌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적 ‘집중화’ 의도”

 

미래목회포럼(대표 이상대 목사)은 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제18-2차 포럼’을 갖고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동규 목사(부대표, 청주순복음교회)는 강의를 통해 고대 근동 나라에서의 개혁 특징과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비교 분석하며 그 의미에 대해 설명했고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어떤 것을 배워야 하는지 제언했다.

 

이 목사는 “유다 주변의 고대 근동에서 왕들이 개혁적인 정책을 시도할 때에는 주로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는 신탁 형태의 신의 명령을 받아 그 개혁의 정당성을 얻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관습의 복원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정책들을 담은 저작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식자층과 엘리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일련의 담화를 진행하는 것이었다”면서 “마르둑을 최고신으로 올린 느부갓네살 1세나 아슈르를 최고신으로 올리고 그 신전을 건축한 산헤립의 경우, 또한 월신(月神)인 씬(Sin)을 최고 신으로 올리며 하란에 신전을 건축한 나보니두스의 행적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고 했다.

 

이어 이 목사는 “요시야의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절차가 나타난다. 율법책의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훌다를 통한 신탁과 신적인 명령이 주어지고 신탁 외에도 종교 개혁과 예식의 규정들을 담고 있는 율법책이 존재했으며 이어서 언약체결 의식과 유월절 축제를 통한 여러 계층들과의 담화와 개혁이 확산 실행되었다”면서 “또한 개혁의 확산에 있어 율법책을 기반으로 하여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종교적인 제의들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율법책은 단순한 신탁이나 계명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으며 구체적인 규정과 지침들을 담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이 목사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제사나 예전만이 아닌 언약 체결과 축제일 준수 같은 종교적인 행위들을 기록한 율법책에 기반했다는 것은 이후에 중요한 발전으로 연결된다. 종교적인 삶에 있어 책의 존재가 단순히 가이드의 역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중요한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라며 “율법책과 이를 기반으로 한 요시야의 개혁을 통해 결국 토라는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단순한 책으로서가 아니라 개혁의 근본이요 개혁의 방향을 지휘하는 지침서였던 율법책은 결국 요시야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책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적 영성으로까지 발전하여 이후 유대교의 발전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산당은 본래 합법적인 제의 장소”

이 목사는 요시야가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인 ‘산당 타파’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련은 산당(high places)에 대한 처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산당의 타파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데 이 중요성은 열왕기하 23장의 종교개혁 해당 본문 중에서 열 번에 달하는 산당의 언급을 통해 확인된다. 실제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산당의 타파는 표면적인 내용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서 “유다의 각 지역에 위치한 산당은 본래 합법적인 제의 장소였다.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서에는 산당이 제의 장소로 사용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방 제의와 관련이 되어 야웨 신앙을 더럽히는 혼합 신앙의 근원지로 여겨진다. 예루살렘 제의 집중화 이전에 유다 왕국의 있던 산당이 ‘지역 성소(provincial sanctuaries)’로서 기능하였다는 주장들을 감안하면 결국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산당의 타파는 단순한 종교적인 정결화가 목적이 아닌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집중화가 주된 의도였다. 산당을 철폐한 것은 단순히 야웨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 이상이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의 종교 체계를 바꾸는 일은 종교와 밀접한 유다의 국가 체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었다”고 했다.

 

“요시야, 정치와 경제 포괄하는 개혁”

이 목사는 요시야의 개혁이 종교적인 의미와 의도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를 포괄하는 개혁이었다고 했다.

 

정치적인 것에 대해 그는 “요시야의 개혁 보고 가운데에는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있는 산당을 부정하게 한 것이 있다. 이것들은 유다의 이전 왕들이 세운 것들 중 일부였는데 여기에서 이루어진 이방 제의는 일반 백성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왕실 외교와 정치의 산물이었다”면서 “이는 요시야의 개혁은 이전 왕들이 남긴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것들의 변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시야 이전에는 정책적이고 종교적으로 합법적이었던 곳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불법적인 곳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요시야 개혁의 중요한 특성을 드러낸다”고 했다.

 

“지역 성소에 대한 종교적 개혁은 세수 제도 변화 의미”

경제적인 부분과 관련해서는 “유다의 제사 제도는 제의를 통해 국가 생산의 상당 부분을 왕궁으로 징수하는 중요한 국가적 제도였다. 기존에 지방의 성소에서 담당하던 이 징수 경로를 바꾸는 것은 국가의 세수 및 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면서 “요시야는 신명기의 구체화된 조항에 따라 국가 수입의 징수 경로를 변화하는 개혁을 추진한다. 백성들이 제사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하되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자들은 해당하는 만큼 은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 가운데서 여행 경비를 제할 수 있게 했고 이 순례 여행을 장려하기 위해 제사하는 날을 보다 인상적인 축제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요시야의 지역 성소에 대한 종교적인 개혁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그 경로를 변화하는 유다의 세수 제도 변화를 의미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 전체적인 경제 사회 권력 구조에 변화를 초래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사회 집단들의 포섭 한계가 곧 개혁의 한계”

요시야가 추진했던 개혁의 한계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목사는 “성경이 증거 하듯이 요시야 개혁의 성공은 일시적이었다. 개혁이 시작되고 십 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해 개혁 역시 멈추게 된다. 요시야 개혁 이전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암 하아레츠는 필시 요시야의 국가 전반적인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들의 지지를 힘입지 못했던 요시야의 개혁은 정상적인 왕권 행사에까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며 “요시야의 죽음 이후 다시 등장한 암 하아레츠는 요시야의 큰 아들인 여호야김이 아닌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유다의 왕으로 세운다. 이는 요시야가 진행한 개혁과 관련된 집단들 중에서 궁극적인 승자가 누구인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유다의 국가 개혁과 부흥은 그 걸음을 멈추게 되고 이후 유다는 왕국의 쇠퇴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요시야 자신과 그의 개혁을 향한 사회 집단들의 포용과 포섭의 한계가 곧 개혁의 한계가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s미래목회포럼 단체사진.jpg

 

“요시야의 율법책 같은 개혁 동력 기준 갖춰야”

요시야의 개혁을 다각도로 분석한 이동규 목사는 한국교회가 어떤 점을 배워야 하는지 제언했다.

 

그는 “요시야는 개혁의 동력이 될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율법책이었다. 백성들이 공감할 절차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율법책을 내놓았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성경이었다”면서 “오늘의 한국교회와 신학, 그리고 목회자에게는 이와 같은 기준이 필요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하다가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는 더욱 성경과 씨름하여야 하고 성경이 가리키는 그 지점에서는 논쟁을 멈추고 함께 어깨를 맞대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만나고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하는 성경에 기준한 공통의 신념을 세워갈 수 있다면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는 요시야의 율법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요시야의 포용 정신을 한국교회가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목사는 “요시야는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 여러 사회적인 집단들을 포용하고 포섭했다. 비록 한계가 있었지만 요시야와 함께 한 이 집단들이 없었다면 그의 개혁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며 “사회가 더욱 다양하고 다원화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우리가 개혁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것은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다. 돌이켜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를 앞선 얀 후스와 사보나롤라와 같은 개혁자들과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혁을 지지하고 추종했던 농민들과 영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역량이자 지경”

특히 이 목사는 목회자들이 사회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려와 손을 잡는 이들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 교회가 가진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높은 자긍심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교회와 목회자는 사회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시대 속에서 교회와 목회자가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이 시대와 사회 속에 이룰 변화와 개혁의 꿈은 요원할 것”이라며 “내려와서 포용하여야 한다. 필요하면 손을 잡고 설득하며 포섭해야 한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역량이고 지경이다. 우리는 이 한계를 넓혀가야 한다. 우리 속에서 조그만 차이는 너그럽게 품어줘야 하고 우리 밖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요시야에게 있어 포용과 포섭의 한계가 그의 개혁의 한계가 되어 그가 죽은 후 급속하게 되돌아갔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상원 기자>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한국교회, 요시야의 ‘포용’ 정신 갖춰야 사회 개혁 가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